어느날 머리에서 뿔이 자랐다│계피
최범규로 말할 것 같으면. 무성한 소문의 소유자이다.
본인은 타인의 입방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듯 하나, 그것은 최범규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소리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자신의 미니홈피 방문자 수가 총 십 만명이 넘었을 당시 본인은 전혀 모르는 듯 하였으나, 실은 99990명이 찍혔을 때부터 언제 저 숫자가 넘어가는지 새로고침을 하며 그 순간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 보았다. 누군가는 그를 허세에 찌든, 관심에 목마른, 같은 수식어로 표현할 수 있겠으나, 본인의 생각은 달랐다. 범규에게 관심이란 행복 내지 쾌감에 가까웠다. 범규가 기억하는 제 생의 최초의 순간부터 관심을 받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를 둘러싸는 소문들은 대개 한 학년에 한 명씩은 있을 법한 전설적인 인물들에 대한 소문들과 늘 비슷한 레퍼토리였다. 그 나이 애들 답게 이성에 관한 소문이 주를 이뤘으며 범규는 사실 유무에 관계 없이 만족했다. 반에서 누구누구가 최범규를 좋아하네, 로부터 시작된 소문은 학교 일진인 2학년 누나가 범규를 찍었다느니, 나아가 옆 학교 여고에는 최근 최범규 팬클럽이 생겼다는 소문까지 파다했다.
‘최범규 존나 재수없지 않냐? 애새끼가 겉멋 들어가지고. 바지는 피도 안 통하게 줄이고 다니는데 선생들도 우리 같은 애들만 뭐라 하지 걔한텐 뭐라 안해.’
학교 일학년 남자 애들 사이에선 이미 지역구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최범규에 대해 평판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사춘기가 시작되면서부턴 으레 이성에게 낯을 가리는 것이 정상이거늘, 범규는 남자들과의 교우 관계보단 여자들과의 교우 관계가 더 좋았다. 그것이 그들에게 범규를 싫어할 수 있는 정당한 사유이자, 범규를 싫어하는 근본적인 원인도 됐다.
그러거나 말거나 범규는 지금의 상황이 만족스러웠다. 남자들에게서 질투 및 선망의 대상이 되고, 여자들에겐 애정의 대상이 됐다. 입학하자마자 학교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댄스 동아리에 들어 유명세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졌다. 제대로 춤을 춰본 적도 없지만 얼굴 덕에 오디션에 통과하고, 다행스럽게도 춤에 재능이 있었던 것인지 연습을 하다 보니 일학년 중엔 범규의 춤 실력이 제일 나았다. 덕분에 선배들에게 서도 독보적으로 예쁨을 받았다. 모자랄 것 없던 범규의 인생에 댄스 동아리 최범규라는 타이틀은 최종적으로 “간지”를 선사했다. 인소에나 나올 법한 과도한 설정이라고 범규는 본인 스스로 생각했다. 그랬었다. 학교 축제가 시작되기 전까지 흠잡을 데 없는 서사였다.
올해로 딱 10기가 되는 댄스 동아리 “댄스의 정석”에는, 동아리가 생긴 그 해 장난스럽게 시작되었다가 학생들의 뜨거운 반응에 힘입어 단번에 동아리 전통으로 이어진 법칙이 있다. 동아리에서 맞이하는 행사 중 가장 중요한 행사라고 할 수 있는 학교 축제에서 남학생들은 여자아이돌 춤을 추고 여학생들은 남자아이돌 춤을 선보이는 것이다.
범규를 비롯한 일학년들은 동아리에 가입하자마자 대대로 내려오는 동아리의 전통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으나 다들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겪어 보기 전에는 그저 남일 같이 들릴 뿐이었다. 걸그룹 댄스나 보이그룹이나 다를 게 뭐냐는 생각도 한 몫 했다.
‘걸그룹 하면 소녀시대지! 지금은 소녀시대 앞으로도 소녀시대 영원히 소녀시대!’
유치한 법칙 중 하나를 더하자면, 축제 참여 곡은 무조건 이학년 선배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의사결정은 동아리 회장인 연준에 의해 쉽게 진행됐다. 소녀시대 태연의 광팬인 연준은 걸그룹 댄스는 무조건 소녀시대여야하는 이유를 에이포 용지에 빽빽하게 프린트 해왔다. 까라면 까야지 별 수 있나. 그 누구도 연준의 광기 어린 주장에 반박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작년엔 선배들의 강압에 의해 소녀시대의 희대 라이벌 그룹인 원더걸스의 커버 댄스를 울며 겨자 먹기로 했던 연준은 이로써 후배들에게 나마 자신의 한을 풀게 되었다.
솔직히 춤을 연습하면서도 실감이 안 났다. 누구 말마따나 춤은 거기서 거기였다. 이게 왜 학교 축제의 꽃이야? 범규는 의구심이 들었다. 연습은 별 탈 없이 진행됐지만, 그걸 지켜보는 이학년 선배들의 음흉한 눈빛은 마치 미래의 고난과 역경을 암시하는 듯 했다. 마음 한구석으로는 불안했다. 축제 당일 이학년 누나가 가져온 가발과 화장품이며 의상을 보고 남자애들은 까무러치게 놀랐다. 이정도는 당연히 생각했어야 되는 거 아니야?
작년 축제 때 최수빈 대박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넌 제2의 최수빈이 될 상이다.
그리고 범규는 거울 앞에서 우스꽝스럽게 변하고 있는 제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반쯤 포기한 채로 이학년 누나의 손길에 얼굴을 맡기고 있는 중이다. 옆에서 키득거리며 그걸 지켜보고 있던 연준이 떡밥을 뿌린다. 형이 아니라 수빈이 형이요? 아무리 그래도 댄스의 정석하면 이학년 최연준, 공식이었는데. 의외의 인물이 등장했다.
범규가 흥미를 보이자 연준은 이때다 싶어 동아리 전용 디지털 카메라를 냅다 들고 온다. 여기 봐봐. 작년 축제 사진이 여기 있는데.. 한참 손가락을 빠르게 누르다 이내 멈춰 선다. 여기 있다. 야 니 사진도 보여줘야지. 최수빈만 팔아먹냐. 범규의 얼굴에 공을 들이던 이학년 누나가 옆에서 핀잔을 주거나 말거나 연준은 신이 났다. 봐봐. 난 좀 징그러운데 최수빈은 의외로 괜찮지 않냐? 연준이 범규의 얼굴에 액정을 들이 밀었다.
거기엔 울상 짓고 있는 연준의 사진이 몇 장 있었고, 뒤로 넘어가자 그와 반대로 해맑게 브이자를 그리고 있는 수빈이 있었다. 얜 덩치가 오바지만. 그래도 얼굴이 하얗고 단정한 얼굴이라 그런지 예뻤다. 댄스의 정석이 최연준 독재 체재가 되지 않은 것은 작년 축제에서 최수빈이 얼굴 하나로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덕이었다는 소문을 이제야 이해했다. 동아리에서도 가장 조용한 선배 중 하나인 수빈이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은지 알 것 같다. 수빈의 얼굴을 그렇게 자세히 뜯어 본 적은 처음이었다. 고화질 액정 속에 담긴 수빈은 호감형이었다. 같은 호감형인 연준과는 또 다른 타입의 호감형이다. 수빈은 묵묵하고 차분한 성격이었지만 시키는 건 줄곧 잘 했다. 춤도 연준에 뒤쳐지지 않을 만큼 췄다.
범규가 멍하니 그걸 보고 있자 연준이 반했냐? 하고 장난스럽게 물어 온다. 아 뭔, 남자끼리 뭔소리예요! 범규의 목소리가 커진다. 하필 그 순간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수빈이었다. 들어오자마자 범규를 둘러싸고 화장을 가장한 분장을 억지로 시키고 있는 꼴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거울 너머 수빈과 눈이 마주치자 범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도 양반은 못 된다. 수빈의 등장에 연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적당히 좀 해라.”
“받은 만큼 돌려주는게 후배사랑인거 몰라?”
수빈이 표정을 풀지 않자 연준이 실실 웃었다. 얘한테 아까 니 사진 보여줬는데. 수빈의 표정이 냉랭해진다. 표정 풀어라. 범규가 너 예쁘다고 했거든. 아 형 쫌!! 이 형 거짓말 잘하는 거 아시죠 혀엉. 수빈과 그다지 친하지 않은 범규는 변명을 주절주절 늘어놨다. 눈썹이 팔자로 축 늘어졌다. 나 억울해요. 그 표정을 읽자 수빈은 왠지 범규를 놀리고 싶어진다. 온갖 가오는 다 잡고 다니더니 알맹이는 영락없는 애새끼다. 연준이 왜 범규를 가지고 항상 들었다 놨다 하는지 알겠다.
“내가 그렇게 예뻤어?”
“그게 아니구.. 아니.. 예쁘긴 예쁘죠 연준이 형은 진짜 뭔, 꿈에 나올까 무서웠는데.. 아니 근데 형은 예쁘기 보단 잘생기신거구…”
“니가 예쁘다면 예쁜거지.”
그말에 범규가 입을 헉, 하고 다물었다. 다이나믹한 범규의 표정을 구경하는 연준은 웃겨 죽으려고 한다. 범규 잘해. 가발을 뒤집어쓴 정수리를 쓰다듬더니 이내 동아리 방을 나가버린다. 저 형 뭐야… 안 그래도 엉망진창인 가발 머릿결이 형편없이 헝클어졌다. 순간 모든 피가 정수리로 쏠린 기분이다. 이상한 형이었다. 그러니까 어디가 이상하냐면, 숙맥처럼 생겨서는 어색한 사이에 살갑게 군다는 점이. 그런 점이 이상한 형이었다.
영원한 것은 절대 없고 불변의 상황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상식이 모자란 범규는 미처 간과하고 말았다. 자신에 대한 소문도 한 순간에 범규가 원하지 않는, 아니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뒤집힐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올해도 축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언제나처럼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무대를 내려오며 범규는 앉아있는 애들의 열성적인 반응에 뿌듯함을 느꼈다. 과장 좀 보태서 고막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범규는 금세 싸이월드에 장식될 제 소식들을 기대했다.
그러나 예상은 범규의 바람을 빗겨 나간다. 축제가 휩쓸고 지나간 다음날, 범규는 묘하게 달라진 분위기를 금세 눈치챘다. 비밀글로 도배 되어야 할 싸이월드 방명록이 잠잠했다는 것은 그렇다 치자. 그런데 이 분위기는 뭐란 말인가. 남자 애들은 원래부터 범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대놓고 범규가 자리에 앉자마자 혐오를 동반한 얼굴을 드러냈다. 이것도 그렇다 치자. 그럼 저를 향한 여자애들의 갑작스러운 낯가림은 뭐란 말인가. 으레 범규가 등장하면 살갑게 말을 건네 오던 여자애들이 조용하다. 이것 또한 그렇다 치자. 뭐야 왜 이렇게 조용해? 옆자리에 앉은 짝꿍 민지도 저에게 호감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이 반에 아무도 없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싸늘했다. 몰라. 임팩트 있는 대답이었다.
그 분위기에 휩쓸려 범규는 점심도 걸렀다. 딱히 같이 먹으러 다니는 패거리가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일주일 전만 해도 남자애들이랑 우르르 가서 먹었고 이번 주엔 거의 여자애들과 먹었다. 그러나 범규가 스스로 둘 중 어디에 껴들기 전에 점심시간 종이 치자마자 반 애들은 범규를 뒤로한 채 급식실로 사라지기 바빴다. 종종 점심시간 끝나고 축구를 하러 갔었지만 그럴 기분도 아니었다. 굳이 안 끼워준다는데 억지로 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애새끼들이 단체로 약이라도 먹었나. 아님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건가. 범규는 생각을 되짚어 봤지만 딱히 걸리는게 없다. 점심을 하루 이틀 거르다 보니 아예 안 먹게 됐다. 매점에서 대충 빵을 사와서 떼우고 책상에 엎드리는게 다반사였다. 그러다 일이 났다.
어디든 인성 나가리인 애들은 있기 마련이다. 점심을 거르고 매점에서 빵을 고르고 있는 사이 일면식도 없는 다른 반 남자애들이 범규를 보고 자기들끼리 비아냥거렸다. 그건 누가 봐도 대놓고 앞담을 까는 거였다. 얼굴을 흘깃 쳐다보는데 모를 리가 있나. 이새끼들이 미쳤나. 저를 둘러싸고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욱하고 화가 올라왔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범규는 셋 중 가장 만만해 보이는 애의 멱살을 잡았다. 순식간에 여자애들이 꺄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더 화가 나는 점은. 한껏 화 난 범규와 달리 멱살 잡힌 당사자는 여유로운 표정이라는 것이다. 멱살을 잡고있는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쳐보던가. 범규를 가소롭게 보는 그애의 눈빛에서 범규는 그런 생각을 읽었다. 쳐봐. 호모새끼 주제에. 뭐?
“너 호모라며.”
저를 지칭하는 단어 중에 단 한번도 호모라는 말이 들어간 적은 없었다. 화가 나기 보단 어안이 벙벙했다.
뭐? 호모? 내가 왜 호모새끼야 이 씨발새끼야. 잡은 멱살을 놓지 않은 채 물었다. 명찰에는 김재혁 세글자가 박혀 있었다. 범규는 얼굴도 모르는 애였다. 재혁아. 내가 왜 호모냐고.
“여자애들이랑 몰려다니는 주제에 여자 한 번도 못 사귄 아다인거 여기에 모르는 사람 없을걸?”
김재혁은 아다라고 말을 쉽게도 짓껄였다. 아다라는 단어는 어감부터 상스럽다. 축제 때 재미있더라 범규야. 꾸미니까 봐줄 만은 하던데. 재혁, 니가 참아. 반에서 나대는 앤지 뭔지 옆에 달라붙은 남자애들이 시종처럼 김재혁을 끌고 가려고 한다. 여기서 먼저 주먹이 나가면 불리하단 것을 범규도 안다. 김재혁도 그걸 알고 더 비아냥 거리는 것이 분명하다. 범규는 이제야 저를 피하던 애들의 의중을 김재혁 덕에 알아챘다. 최범규가 호모라는 소문이 축제날 이후 전교에 역병처럼 급속도로 퍼진 것이다.
이 씨발 새끼야.
나, 호모, 아니야.
김재혁의 입에서 나오는 저급한 말에 몸이 먼저 나갔다. 범규가 참지 못하고 먼저 재혁의 복부를 사정없이 발로 깠다. 체구가 말라서 그렇지 어릴때 부터 다진 몸은 제법 힘이 셌다. 남자애들은 신이 나서 싸움을 구경하느라 바빴고, 여자애들은 도망가거나 선생을 부르러 나가는 애들도 있었다. 재혁이 반격 한 번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자 정신줄을 훼까닥 놔버린 범규가 발을 들었다. 재혁의 곁에서 시종처럼 들러붙어 있던 놈들 조차 범규에게 달려들지 못하고 겁을 먹었다.
야, 최범규. 범규의 행동을 멈춰 세운건 수빈의 등장이었다. 범규와 재혁을 둘러싼 애들을 헤치고 등장한 수빈은 막무가내로 범규의 팔을 잡아다 끌었다. 너 미쳤어? 하필 최연준도 아닌 최수빈이었다. 이새끼가 저보고 호모새끼라고 하잖아요. 그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말이 쉽게 튀어나오지 않았다.
여기서 얘 더 팼으면 너 최소 정학이야.
아수라장이 된 매점 앞에서 수빈은 범규만 들리도록 작게 말했다. 오지랖이었다. 그런 수모를 겪는데 참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정학을 당하든 수빈과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반항심에 대답도 않고 범규는 뒤를 돌았다. 멀리서 담임이 허겁지겁 쫓아오고 있었다. 좆됐음을 감지한 순간이다. 인생이 이렇게 순식간에 신박한 방법으로 꼬일 수가 있나, 생각했다. 도망가기에는 이미 늦었다. 최범규 니 미쳤나! 경상도 출신인 담임은 화나면 사투리가 먼저 튀어나온다. 복도가 호통 소리로 쩌렁쩌렁 울렸다. 꺄아악! 애들이 다시 한번 비명 비슷한 소리를 질렀다. 뒤를 돌아보니 수빈이 바닥에 나뒹구는 재혁을 일으켜 세우는 척 하다 발로 깠다. 최수빈! 조용하던 수빈까지 가담하니 담임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재혁아 근데 잘못 짚었어. 범규 여자 엄청 좋아하는데. 김재혁을 붙잡고 속삭이는 수빈의 말을 범규는 똑똑히 들었다.
교무실에 나란히 불려가 출석부로 머리통을 몇 대 맞았다. 수빈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고, 범규는 반항심에 고개를 치켜 들었다. 덕분에 두대를 더 얻어맞은 범규는 그제서야 고개를 숙였다. 왜 애를 팼냐고 닦달하는 담임의 말에 수빈이나 범규나 입을 다물었다. 말 안하면 부모를 부르겠다는 말에 범규가 놀라 먼저 얘기를 꺼냈다. 걔가 먼저 시비 털었는데요. 뭐라고 시비를 털었는지 담임이 취조했다. 거기에 대고 호모새끼라고 시비를 걸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담임은 다시 한 번 물었다. 수빈이 먼저 이야기를 꺼낼까 조마조마했다. 십 초간 정적이 흘렀다.
“궁금하시면 쌤이 김재혁 데려오세요.”
모종의 반항이었다. 담임은 피도 안 마른 게 싸가지가 글러먹었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범규를 보는 수빈의 눈이 동그래진다. 제가 먼저 잘못한 거 아닌데 왜 저한테만 그러시냐구요. 범규는 그치지 않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고등학교에서 남자애들끼리 시비와 주먹다짐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일방적으로 일어나는 일도 있었지만 대게 싸움은 쌍방이다. 담임도 그걸 아는지 말대꾸 그만하라는 말만 하곤 더 이상 꼬투리를 잡지 않았다.
임마, 니네 처음이라 봐주는거야. 화를 식히던 담임은 다시 둘의 머리를 번갈아 출석부로 내리쳤다. 다시는 주먹질 하지 마. 알았어? 그땐 생활기록부에 줄 긋는 거야, 너네. 왁스로 방방 띄운 머리가 자꾸 숨이 죽어 범규는 손으로 머리를 몇 번이고 매만졌다. 담임은 징계를 내렸다. 담임이 내린 벌은 한달 동안 담배꽁초 이백 개를 모아오는 것이다.
반 애들은 언제 범규에게 그런 소문이 돌았냐는 듯이 다시 살갑게 굴었다. 특히나 남자애들에게 주먹을 좀 쓴다는 것은 영웅에 가까웠다. 전 같았으면 저에게 달라붙는 남자애들의 관심과 아부가 싫지 않았겠지만, 한번의 고비를 넘긴 범규의 생각은 좀 달라졌다. 보아줘봤지 지들끼리 저를 두고 뒤에서 무슨 말을 하고 다닐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저를 우상화하는 애들을 쳐내진 않았지만 무리들 사이에 끼려고 하지도 않았다. 웃기게도 점심시간마다 수빈이 일학년 교실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범규야. 밥 먹고 담배 주우러 가자.
최범규는 이 형이 나를 동정하는건가?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수빈은 전교생 앞에서 최범규가 게이라고 시비 털리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최수빈이 최범규의 반에 침입해 반 애들의 인사를 받고 범규의 팔을 일으킨 순간 범규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했다. 반 애들과 점심을 먹을 바에는 친하지도 않은 이 형과 먹는게 차라리 낫겠다 싶었다.
그렇게 이학년인 수빈 덕에 일학년들을 제치고 급식을 받았을 때 까진 기분이 그럭저럭 괜찮았다. 맛도 없는 식판을 깨작거리는 범규와 달리 수빈은 그 맛도 없는걸 잘도 푹푹 퍼 먹었다. 그러다 문뜩 생각이 들었다.
“형. 제가 불쌍해요?”
수빈이 저를 동정한다고 생각을 해봤자 좋을 거 하나 없다는 거 알지만.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불쑥 나타나서 갑자기 밥을 같이 먹자고 하는 것은. 수빈이 범규를 구해줬든 말든 일차적으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왜? 젓가락질에 열을 올리던 수빈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묻는다. 연준이가 너 점심 잘 안먹는 것 같다고 하길래. 그럼 연준이 형이랑 같이 오지 왜 혼자 왔어요. 연준이 요즘 대회 준비한다고 한창 바빠. 밥도 안 먹고. 어차피 나도 같이 밥 먹을 사람 없었는데 잘 됐지. 수빈의 말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했다. 아무리 의심이 들어도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대답이었다. 연준이 입시에 중요한 대회 출전으로 바쁜 것은 사실이었다. 거의 취미로 댄스 동아리를 하는 범규와 수빈과는 달리 연준은 제법 춤에 진심이었다.
함께 점심을 먹으면 수빈은 항상 매점엘 갔다. 범규와는 별로 좋은 추억이 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수빈은 매번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이든, 초코우유든, 뭐든 사줬다. 범규는 식판 가득 밥을 먹고도 태연하게 아이스크림까지 해치우는 수빈의 내장이 신기했다. 원랜 점심 먹고 축구도 종종 했었지만 범규는 이제 축구가 싫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같이 축구를 하던 애들에게 정이 떨어져서 축구도 싫어졌다. 축구 시간은 자연스레 징계를 수행하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한 달 동안 모아야하는 담배 꽁초를 수빈과 돌아다니며 교내 방방 곡곡 뒤졌다.
“담배하면 옥상이지.”
수빈은 느슨해진 점심시간을 틈타 옥상으로 올라갔다. 여기 잠겨있지 않아요? 옥상 담배의 존재를 몰랐던 범규는 의아했다. 이거 힘으로 이렇게 하면 열리는데. 수빈이 문고리를 잡고 돌려 힘으로 몇 번 잡아 당기자 허무하게 문이 열렸다. 초록색 페인트로 짙게 칠해진 옥상 바닥에 버려진 담배 꽁초가 눈에 띄었다. 백 개 중에 벌써 열 개는 찾은 셈이었다. 옥상 바닥에 깔려있는 매트 위로 수빈이 벌러덩 누웠다. 너도 누워. 수빈이 제 옆자리를 툭툭 쳤다. 어색하게 그 옆에 따라 누웠다. 매트에서는 희미하게 담배 냄새가 났다.
“형도 담배 펴요?”
“그러게 생겼어?”
아니요. 별루… 그건 까 봐야 아는 법이었다. 안 펴. 애들 피러 갈 때 가끔 따라갔거든. 담배 냄새는 극혐이었는데 매트에서 희미하게 나는 담배냄새가 싫지 않았다. 같은 담배 냄샌데. 오히려 맡고 싶어서 코를 킁킁 댔다. 너 담배 좋아해? 수빈이 장난 섞인 말로 물었다. 아니… 좋은 냄새 나는데. 형 한테서 나는 냄샌가. 무의식 중에 생각한다는 것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사실 수빈에게서 딱히 어떤 냄새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나 향수 안 뿌리는데. 수빈이 셔츠에 코를 대고 맡았다. 옷에서도 냄새 안 나는데. 형 샴푸 뭐 써요? 나? 한방 샴푸. 그런 실 없는 말을 하다 웃었다. 웃기고 싱거운 형이다. 세상 순수하게 생겨서 별로 안 그럴 것 같다는 점도 점점 범규의 마음에 들었다. 담배 꽁초 백 개는 생각보다 일찍 모을 것 같았다. 좋아해야 할 일인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다.
답은 재빠르게 나왔다. 수빈과 함께 하는 시간이 생각보다 재밌어서라고 생각했다. 시시콜콜한 말들을 주고 받고. 식후엔잔뜩 달콤한 것들을 입에 욱여넣고. 담배 꽁초가 어디 있을까 전교의 바닥이란 바닥은 눈알 빠지게 구경하는 것들이. 생각보다 재밌었다.
그러니까 한 천개는 모아 오라고 했어야지. 요즘 애들이 얼마나 담배를 많이 피는지 담임은 모르는 게 분명하다. 옥상만 올라오면 백 개는 일주일 안으로도 가능할 것 같았다. 얘들아 담배 피지 말자. 범규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담배 피지 말아줘라. 다시 속으로 빌었다.
김재혁의 말마따나 최범규는 아다였다. 단 한번도 여자를 사귄 적이 없었다. 왜 좋아하지도 않는사람과 사귀어야 하며, 왜 그 사실을 전시해야하는 걸까. 어느 반 누구랑 어느 반 누구랑 사귄다는 소식에도 그때만 그렇구나, 할 뿐이었지 금세 잊었다. 누가 범규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아도 기분은 좋지만 그것도 그때 뿐이었다. 심지어 고백을 해도 범규는 매번 자리에서 칼같이 거절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구식같이 들릴지도 모르지만, 정말 좋아하는 사람과 사귀고 싶었다. 그래서 그게 범규의 인기 요인이기도 했다. 자길 좋아한다 싶으면 대뜸 사귀고 보는 요즘 애들 사이에서 누구와도 사귀지 않는 범규는 특별하고 쿨하고 멋진 애로 분류됐다.
가을이 끝나가는 어느 아침이었다. 범규는 답지않게 평소보다 집에서 일찍 나왔다. 일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다. 학교와 집은 걸어서 십 분이면 갔다. 가까운 애들이 자주 늦는다고, 범규도 그랬다. 집에서 나오면 아무리 빨라도 일곱 시 오십 분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무려 이십 분이나 일찍 나왔음에 감탄했다. 여유가 생기니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들이 들어오기 마련이었다.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았다. 똥강아지처럼 길목을 쏘아 다녔다.
잡았다 요놈. 그러다 목덜미를 잡혔다. 누구세요? 범규가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범인은 범규의 두 눈을 손으로 막았다. 어쩌다가 뒤에서 안긴 꼴이 됐다.
“장난치면 죽는다.”
“쟹냰치먠 죽는댸.”
범인은 목소리까지 위조해가며 범규를 놀렸다. 하지만 범규는 범인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범인의 손 안에 갇힌 범규의 속눈썹이 사각사각 범인의 손가락을 간지럽혔다. 범규의 마음도 간지러웠다. …연준이 형이예요? 범규는 알면서 부러 모르는 척을 했다. 에이. 나 최연준 아닌데. 그제서야 범인이 실망한 표정으로 범규의 시야에 들어왔다.
알고 보니 둘은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 저보다 몇 걸음 앞선 범규의 뒷모습을 단번에 알아본 수빈이었다. 그것도 같은 단지 옆 동이었다. 왜 오며 가며 한 번도 못 봤지? 그건 아마 범규가 늘 늦은 시간에 나왔고 수빈은 이른 시간에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수빈은 종종 같이 학교를 가자고 말했다. 뭐 그러던가요.
말은 그렇게 해놓고서 엄마한테 삼십 분 일찍 깨워 달라고 졸랐다. 지각이나 하지 말라고 몇 번을 헛소리 취급하다 여섯시 반부터 맞춰놓은 알람에 엄마도 두 손 두 발 다 드셨다. 평소보다 삼십 분 더 일찍 일어나서 준비하는 시간에 십분 더 공을 들이고 집에서는 이십분을 더 일찍 나갔다. 안하던 짓 하면 죽는다는데. 고삼인 친형이 비아냥거렸지만 범규는 속으로 좆까라고 욕을 했다. 수빈이 형이 우리 형이였으면 좋겠다고 잠시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형한테 엄청 맞고 살았는데 최수빈이라면 안 그럴 것 같았다.
등교길에 수빈과 마주쳤을 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인 척 연기를 했다. 시간대도 겹치는데 왜 이제서야 봤지? 수빈이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범규도 모르는 척 맞장구를 쳤다. 수빈은 우리 운명인가 봐. 그런 말을 쉽게도 내뱉었다. 고등학생 남자가 하기에는 낯간지럽다고 생각했다. 수도권 사는 애들은 원래 그런가. 싶었다. 그러기엔 저에게 마냥 곱지만은 않은 시선을 보내던 몇몇 애들이 생각났지만.
십분 걸리는 등교길이 길고도 짧았다. 수빈에 대해 모르는 것을 알기에 좋은 시간이었으면서도 부족했다. 수빈은 게임을 좋아했다. 중학생때까진 스타크래프트를 주로 하다가 요즘엔 던파를 가장 많이 한다고 했다. 범규도 게임을 좋아했다. 신나서 말을 막 늘어놓았다. 수빈은 다음 동아리 연습이 끝나면 같이 피씨방엘 가자고 했다. 범규는 음식 중에 떡볶이를 제일 좋아했다. 수빈이 신기해하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피씨방에 갔다 떡볶이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우리 왜이리 잘 맞아? 신기해하는 수빈을 두고 범규는 운명이라는 게 존재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끝났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정말 운명이 존재하기도 하는 것인지, 그 망할 운명은 범규를 괴롭혔다. 짝꿍 민지가 수빈오빠 여자친구 있대? 범규를 떠보기 시작한 게 불씨가 됐다. 어? 되묻는 것이 꼭 기분나빠 보였는지 민지는 아~ 왜~ 있잖아 너 맨날 같이 다니는 그 오빠 하고 범규의 입에서 콩고물이라도 떨어지기를 바라는듯 구슬렸다.
수빈은 인기가 많았다. 이학년 최씨 두명, 하면 최연준 최수빈이라고 모두가 알아줬다. 연준이 인기가 많은 건 진작에 알았지만 수빈도 이렇게나 인기가 많은 줄은 몰랐다. 민지가 최수빈 얘기를 꺼내자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반 여자애들이 자리로 몰려들었다. 갑자기 기분이 구렸다. 그러고보니 범규는 수빈의 여자친구 존재 유무도 몰랐다. 싸이가 있으면 알기라도 했을 텐데 수빈은 그 흔한 싸이월드 계정도 없었다.
“없을걸?”
없으면 없는 거지 없을걸은 뭐냐고, 여자애들이 범규를 은근히 타박했다. 핸드폰을 계속 붙잡고 있는 것도 보지 못했고 딱히 같이 있을 때 여자 얘기를 한 것도 아니었다. 여자애들의 타박에 불쾌한 기분은 점점 선명해졌다. 아 몰라. 없어 보이니까 없다고 하지 궁금하면 니들이 물어보던가. 범규는 여자애들이 뭐라 하던 말던 책상 위로 엎드렸다.
여자애들은 저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수빈에 대해 쉽게 얘기하고 즐거워했다. 맨날 범규랑 같이 점심 먹으러 내려오는게 성격이 좋아 보인다, 춤 못추 게 생겨서 잘추는 것도 좋다, 그 오빠 생각보다 공부도 잘한다더라, 성격이고 성적이고 뭐고 얼굴만으로 이미 학교를 먹었다는 둥 여자친구가 없는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책상에 엎드린 범규는 생각했다. 여자친구가 있는 걸까. 아니면 사귀어 본 적이라도 있을까. 생각은 자연스럽게 그런 쪽으로 흘렀다. 열 여덟이면 그렇고 그런 것들을 안 해 봤을 확률보다 해보았을 확률이 높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 우울했다. 요즘 범규는 넋을 놓고 있을 때마다 이런 식으로 수빈이 생각났다. 수빈은 불가항력 같았다.
애들 말대로 나는 게이인걸까?
범규는 단 한번도 제가 남자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럴 수 있다는 확률을 애초에 배제하고 살았다. 하지만 이 기현상을. 수빈이 자꾸만 생각나고 여자애들이 수빈의 여자친구 유무를 저에게 물었을 때 들었던 감정은. 질투심이 아니라는 걸 범규도 그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았다. 그건 단순한 호감을 넘어선 사랑이었다. 범규가 거칠게 머리를 헝클었다. 여자애들이 범규 왜 저래, 하고 일제히 시선을 집중했다. 수빈 때문에 게이가 된 것 같다.
연준은 범규를 관필이라고 불렀다. 관심이 필요한 아이, 줄여서 관필이었다. 범규가 아닌척해도 늘 관심에 목말라 하는 걸 가까운 사이인 연준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 관심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더 절실해졌다. 범규는 제가 이렇게 참을 성 없는 사람인지 처음 알았다. 최근에 수빈과 친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수빈이 저 말고도 같은 댄스의 정석 후배들을 살뜰히 챙겼다. 범규는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수빈의 곁을 맴돌았다. 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즐겁게 웃고 떠드는 수빈을 보면 연습 중에도 시선이 절로 그쪽을 향했다. 그러니 연습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일주일 안에 외워와야 하는 안무를 범규 혼자 못 외워왔다. 동아리의 주축인 연준이나 수빈이 유한 편이여서 그렇지 원래 댄스의 정석이 군기 잡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회장인 연준과 다르게 부회장 형은 특히 심했다. 하필 그 형이 일학년 지도 담당이었다. 범규는 동아리 하기 싫어? 연습해온 안무를 다 같이 검사받는 날 범규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것이 벌써 다섯 번째다. 일학년 애들이 죽상이었다. 부회장 형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음이 됐다. 잠깐 쉬었다 하자는 말도 없이 연습은 계속 됐다. 힘이 빠지니 범규 말고도 안무를 틀리는 애들이 속출됐다. 부회장 입에서 쌍욕이 나오기 직전인 분위기가 됐다. 이상하게도 그런 순간에 수빈이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운명인가 봐, 하고 말하던 수빈이 생각났다. 심지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수빈과 눈이 마주쳤다. 수빈은 언제나처럼 웃음이 다정했다 범규는 이제 반정도 그걸 믿었다. 수빈이 들어오니 말만 부회장이지 실세로는 수빈에게 밀리는 부회장 형이 입을 꾹 닫았다. 쉬엄쉬엄해라~ 하고 동아리 의자에 앉으면 애들도 그제서야 맘이 놓여서 슬금슬금 수빈의 옆을 차지하고 앉았다. 좋아하니까 그런 것들이 자꾸 눈에 띄기 시작한다. 수빈은 애들이 거는 말에 대강 대답하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여자친구 있나. 키패드 위로 빠르게 움직이는 손가락은 의구심이 들게 만든다.
“형 화장실 갔다 오면 다시 하자.”
그렇게 말하고선 수빈이 핸드폰을 책상 위에 턱 하니 올려 놓고 동아리방을 나갔다. 몰래 봐선 안된다는 걸 알았지만 수빈이 대놓고 핸드폰을 놓고 가니 궁금증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다. 폴더폰을 쓰는 범규와 다르게 수빈의 핸드폰은 슬라이드 폰이었다. 범규는 다른 애들의 눈치를 살피다 아무렇지 않게 액정을 눌렀다. 다행이 아무도 보지 못한 듯 하다. 배경화면은 평범했다. 수빈도 다른 남자 애들과 다를 바 없었다. 연준이 지소앞소 강경 소녀시대 파라면 수빈은 두루두루 좋아하는 편이었다. 한창 인기 많은 걸그룹 멤버의 셀카였다. 이름 모를 어느 사람의 셀카였으면 가슴이 철렁했겠지만 차라리 아는 얼굴이라 다행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핸드폰을 내려 놓았다.
수빈과 점심을 먹고 눈알 빠지게 담배꽁초를 모으러 다닌지 삼주 쯤 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은 심란해져만 갔다. 그런 범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빈은 가끔 범규 몫의 담배꽁초까지 미리 모아오곤 했다. 담임이 이백 개를 모아오라고 준 지퍼백은 벌써 가득 찼다. 세 보지는 않았지만 대강 이백쯤은 될 것 같았다. 학교에 담배 꽁초가 이렇게 많이 있는지 범규는 처음 알았다. 수빈이 오며 가며 네 것까지 주웠다고 자랑을 하며 웃는데, 범규는 울화통이 터졌다. 의무적으로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걸 수빈은 모르는 걸까? 애초에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둘은 인적이 드문 체육관 건물 뒤편에 무릎을 쪼그리고 앉았다. 여기서도 애들 담배 많이 펴. 그렇게 말하는 수빈은 교내의 숨은 흡연 장소는 모조리 알고 있는 듯 했다. 본관에서 거리가 먼 체육관은 비교적 교사들의 인적이 드물기 때문이었다. 짧은 담배꽁초들 사이에서 범규가 장초를 발견했다. 수업 시간이 다 된 것인지, 선생들을 만날까 봐 달아난 것인지 끝에도 태워지다 말았다. 범규가 그걸 들어 입에는 대지 않고 살짝 피는 시늉을 했다.
“나도 줘봐.”
수빈이 범규의 손에서 담배를 뺏어 들었다. 어설픈 손가락 사이로 담배가 빠져나간다. 수빈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고 담배를 들이마셨다가 내뱉는 시늉을 했다. 그게 뭐라고 범규는 홀린 듯 바라보았다. 아직 어린 티가 나는 얼굴에 비해 수빈의 손은 크고 단단했다. 하필 그 손에 끼워진 게 담배여서인지 수빈이 어른 같았다.
“어때?”
“형 담배 안 핀다면서요.”
“맞아. 안 펴.”
그러고선 지퍼백 안으로 담배를 집어 넣었다. 그거 내가 주운 건데. 중얼거리자 내가 니꺼 많이 주워다 줬잖아 임마. 말은 하면서도 범규의 지퍼백 안에 넣어주는 수빈이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점심시간에도 공기가 추웠다. 바람이 훅 불자 공기를 타고 시원한 담배냄새가 났다. 담배 안 핀 다더니. 거짓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형 있잖아요.”
“응.”
“진짜로 운명이 있다고 생각해요?”
속으로만 생각하던걸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놈의 운명 이야기는 지독하게도 범규의 머리 속을 떠돌았다. 이렇게 갑자기 가까워 진 것. 같은 아파트 같은 단지 옆 동인 것. 게다가 같은 동아리인 것. 심지어 같은 최씨인 것도 이제는 운명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심각한 범규와 달리 수빈은 운명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범규야, 넌 가끔 엉뚱한 것 같아.
“제가 왜요?”
“그냥.”
운명이 있을 수도 있는 거고 없을 수도 있는 거고. 수빈은 그렇게 말했다. 역시 문과. 범규는 이과 갈 거야 문과 갈 거야? 수빈이 물었다. 저 공부 못해요. 문과 가야죠 뭐..
“근데요 형. 우리 이거 끝나면 어떡해요?”
이제는 생각을 거치지 않고 말이 나왔다. 범규는 제가 말해놓고도 아차 싶었다. 뭘 어떻게 하냐는 듯이 수빈은 이해하지 못했다는 얼굴을 하고 눈을 한 번 느리게 깜빡였다. 날이 추워서도 있지만 수빈이 저렇게 무표정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면 주변의 온도가 유독 낮아지는 느낌이었다. 범규는 그 공기 속으로 빠져 들었다. 처음엔 다정해서 좋았다. 그러나 가끔 보여주는 서늘한 얼굴도 범규는 맘에 들었다. 남들이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이미 수빈에게 빠질 만큼 빠진 범규는 수빈의 모든게 좋았다. 형. 나 좋아해 달라고 안 할테니까 알아줘요. 그러다 최범규 답게 욕심이 났다.
“아니.. 그니까요. 이거 끝나면 연준이 형도 대회 준비 거의 끝나가니까. 이제 밥도 같이 못 먹을거고.”
모든 것은 핑계였다. 숨기는 것이 있을 때엔 핑계가 길어지기 마련이다.
“가끔 매점에서 형이 뭐 사줄 때 되게 좋았는데.”
사실 범규는 군것질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범규가 좋아하는 건…
“그냥… 다 변명이고요. 제가 형 좋아해요.”
수빈이었다. 그 순간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얼음처럼 굳은 수빈이 종소리와 함께 땡 하고 풀렸다. 그냥 그렇다구요… 똑같이 좋아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알아달라는 마음이었는데 수빈에게 제 마음을 고백하고 나니 금세 욕심이 났다. 당황한 수빈의 표정을 보니 범규도 당황스러웠다. 알아주기만 하면 다 될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제는 수빈도 저를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범규는 생각했다.
형 아까제가한말이요 걍모르는척해주심 안될까요
형 아까
형
수빈이형
범규는 키패드가 닳도록 몇 번이고 문자를 썼다 지웠다 했다. 당연히 결국 아무것도 보내지 못했다. 자정이 지나고서도 수빈에게서도 아무런 문자가 안 왔다. 수빈의 당황한 표정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인데 조금 상처 받았다. 내일 일찍 가야 돼 말아야 돼. 수빈의 등교 시간에 맞춰 억지로 일찍 일어나 졸린 눈을 부릅 뜨고 나가는 것도 내일부턴 그만 둬야 하나 싶었다. 수빈이 제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으나 부담을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부담이라고 생각하니 또 화가 났다. 범규는 원래도 기분이 왔다 갔다 했지만 수빈을 좋아하고 부터는 그게 더욱 심해졌다. 내가 좋아하는데 왜 그 형 눈치를 봐야 돼? 화살은 수빈에게 돌아갔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 그 형이 나빴다. 모순적이었다. 분명 마음만 알아주면 된다 생각했는데 자꾸만 그게 생각났다. 왜 고백을 지금 여기서 하냐는 듯한 수빈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게 또 잘생겨서 짜증이 났다.
애꿎은 연준에게 문자를 보냈다. 형형형형 연준이형 대회 잘 했어요??? 사실 딱히 연준이 생각나서 한 건 아니었지만 누구라도 대화를 나눌 사람이 필요했다. 연준에게선 금방 답장이 왔다. 잘했징 내가누군데ㅋㅋㅋ 범규는 형식적으로 연준을 몇 번 칭찬하다 본론을 깠다. 형 근데 저 우울해요.......... 점을 90자 꽉 채워 보내니 연준이 호들갑을 떨었다.
왜 뭔데 무슨일이야 우리관필이
걱정하는 듯한 말투면서도 그놈의 관필이 소리는 그만 두질 않았다. 그냐앙........... 하고 또 점을 90자 꽉 채워 보내니 누가 괴롭히기라도 하는거냐면서 난리가 났다. 연준은 이래봬도 의리 빼면 시체였다. 수빈이한테 너좀 잘챙겨주라고 했는데 걔가 잘 못해주디????? 한때 최연준이랑 최범규 둘이 형제 아니냐며 소문이 돌았는데, 그 소문이 왜 돌았는지 알 것 같았다. 범규가 1만큼 반응하면 연준이 10만큼 반응해줬다. 연준은 눈치가 없었지만 이상하게 때려 맞추는 건 잘 했다. 수빈이 잘 해주지 못한 게 아니었다. 때로는 지나친 다정함이 문제가 된다.
연주니형 우리 내일 연습 끝나고 떡볶이먹으러가요........
그러고보니 같이 떡볶이 먹으러 가자면서. 피씨방에 가서 던파도 하기로 해놓고서 수빈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나만 진심이었나. 그랬던 걸까. 그랬던 것 같다. 연준은 떡볶이 소리에 좋아!!!!!!!!!! 느낌표 열개를 보내며 열렬히 반응했다. 범규는 알았다. 내일 떡볶이를 먹으러 가도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것이라고. 수빈과 먹는 떡볶이가 아닌 이상 범규에겐 무의미 하다고.
수빈과 범규의 점심시간은 연준이 대회를 마침과 동시에 허무하게 끝났다. 연준이 먼저 수빈과 함께 범규의 반으로 와서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으나, 수빈과 눈이 마주친 범규는 거절했다. 연준은 눈치없이 야 범규 배 안 고픈가봐 하고 쌩하니 돌아섰다. 또래 남자애들보다 먹는 양이 적기도 했지만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수빈의 얼굴에서 범규는 알 수 없는 치기를 느꼈다.
엎드려서 잠이나 자고 있는데 누가 어깨를 툭툭 치길래 범규는 잠에서 깼다. 벌써 수업시간이 다 된 줄 알았더니 교실이 시끄러웠. 아 누가 점심시간 안 지났는데 깨우냐, 고개를 들어보니 수빈이 형이었다. 배고플 텐데 먹어. 그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뒤를 돌아 사라졌다. 어안이 벙벙했다. 검은색 봉지 안에는 범규가 좋아하는 군것질 거리들로 가득했다. 고구마 피자빵, 가나 초콜릿, 크런키, 초코우유, 썬키스트 사탕, 자유시간.. 이빨 다 썩겠다. 아까는 심장이 지구 내핵을 뚫고 돌진했다면 지금은 초고속으로 수직상승 하는 것 같았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나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이러는 건 너무하지 않나. 그러나 그 다정함에 여전히 설렌다는 것도 문제였다.
방과후 범규는 동아리방에 들렀다. 동아리방에는 2학년들만 잔뜩 있었다. 어, 범규다. 범규는 먼저 알은체를 해오는 수빈을 분명 보았다. 목소리도 들었다. 그러나 들은 체 만 체 하며 연준이형! 하고 연준에게 안기다시피 달렸다. 왜 이래 징그럽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연준이 제 옆자리를 툭툭 쳤다. 앉으라는 뜻이었다.
“형. 시내에 엄청 맛있는 떡볶이 집 있다는데. 생활의 달인도 나온. 끝나고 거기 가요.”
수빈의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연준은 책상위로 드러누우며 어엉? 그래. 하고 범규의 옆구리를 콕콕 찌른다. 우리 범규 떡볶이 먹고싶었쪄용? 으으 형이 더 징그러워요. 범규가 싫어하는 시늉을 하자 연준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보는 수빈은 무표정이 됐다. 범규는 내심 신경이 쓰였지만 계속 수빈을 모르는 척 하기로 한다. 보지 말자. 정 든다. 수빈을 좋아하는 일은 마음이 아팠다. 몰랐는데 제 마음을 고백한 순간 알았다. 이건 자해와도 같았다. 그 얼굴을 보면 통증이 심해졌다. 그러니까 수빈의 눈을 마주치면 안됐다. 보지 말자. 정 든다.
근데 우리 둘만? 핸드폰 진동이 울리길래 확인을 했다. 발신자는 연준이 형이었다.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형과 눈이 마주쳤다. 연준이 급하게 문자 한 통을 더 보냈다. 수빈이는? 범규는 연준의 눈치에 감탄했다. 하루 종일 수빈을 피하고 있는데 연준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범규는 급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핸드폰 진동이 계속 울렸다.
너 수빈이랑 친해진거 아니었어??
수빈이가 계속 니얘기만 하던데… 점심먹을때도
범규는 울고 싶었다.
연습이 끝나자마자 연준과 범규는 부리나케 시내를 향했다. 아니, 범규가 연준을 억지로 잡아 끌어 시내의 유명한 떡볶이 집엘 데려갔다. 여자애들에게서 얻어낸 고급 정보였다. 사실은 수빈과 이곳에 오고 싶었지만 결국 수빈과는 오지 못하고. 제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연준이었다.
“여기 떡볶이 디게 맛있당.”
연준이 입안에 떡볶이를 흡입하 듯 욱여 넣으며 말했다. 범규가 떡 하나를 잘게잘게 쪼개 먹을 때 연준은 세네 개씩 먹었다. 떡볶이를 바라보는 범규의 표정이 심각하다. 연준은 맛있게 먹다 영 진도가 나가질 않는 범규를 보고 왜, 맛없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다. 범규가 먹잇감을 덥썩 물었다.
“형. 만약에….”
“친구 중에 게이가 있으면 어떨 것 같아요?”
뭐? 놀란 연준은 펄쩍 뛰었다. 그런 연준의 반응을 보고 범규는 괜히 말했다고 생각했다. 친한 형이었지만 이런걸 물어볼 정도는 아니었나. 그래도 범규딴에는 연준이 믿음직스러운 형이었건만, 심각한 표정이 되는 연준에 금세 후회가 된다.
“누구야. 딱 말해. 혹시 최수빈? 수빈이가 게이야?”
아뇨! 생각지도 못한 연준의 반응에 이번엔 범규가 길길이 날뛴다. 차라리 수빈이 게이였으면 좋겠다. 범규는 다음 생엔 수빈이 저를 짝사랑하는 사람으로 태어나길 바랐다. 연준이 거의 해치운 떡볶이는 반쯤 남은 채로 줄어들지 않는다. 대화 주제는 제법 심각했다. 연준이 턱을 매만지면서 생각에 빠졌다.
“만약에요.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럼 어쩔거냐구요.”
넌 이상한 상상 잘 하더라. 그 말을 하는 연준에게서 엉뚱한 것 같다고 말하던 수빈이 겹쳐 보였다. 쓸데 없는 상상이라고 치부하는 연준이었지만 범규는 마음을 졸였다. 아 빨리 생각 좀 해봐요. 게이라는 단어. 성 정체성. 연준은 그런걸 단 한번도 생각 해 본 적 없는 사람 같았다. 범규의 재촉에 연준이 야, 근데. 하고 운을 띄운다.
“별로 상관 없지 않나?”
나 좋다고 쫓아다니면 당황스러울 것 같긴 한데,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니까. 남자가 남자를, 여자가 여자를. 뭐 그럴 수도 있지. 배척하고 보는 건 이제 좀 구시대적이지 않냐. 그런가… 범규는 그 말을 듣고 제 일이 아닌 척 했지만, 이 형이 이런 생각을 할 때도 있나 싶었다.
“아님 어떤 미친놈이 너 좋다고 따라다니든?”
아 형! 그런 거 아니라고요오… 야 말만해. 세상이 하도 팍팍해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누가 우리 관필이한테 그러면 형이 패준다. 자꾸만 허를 찌르는 연준에 웃음이 피실피실 새어 나왔다. 내가 형 보다 싸움 잘 할 듯. 그래도 나름 저를 생각해준다고 하는 말이 고마웠다. 하지만 제가 수빈을 좋아한다는 건 지구 끝까지 비밀이었다. 수빈에겐 쉽게도 고백한 주제에 죽어도 남들 앞에선 티내기 싫은 게 최범규였다.
연준은 요즘 싸이월드에 동아리 홍보 게시물을 올리는 것에 재미가 들렸다. 어디서 주워 들은 것인지, 자기 PR시대라며 제 춤 영상을 올리기 시작하더니 동아리 애들에게 거의 빌다시피 허락을 구해 연습 영상이며 심지어 축제 때 영상까지 손수 편집해 올렸다. 아 형! 왜 이런걸 올려요! 여장하고 춤 춘 영상이 박제되었다는 것에 범규는 경악했지만, 돌려보면 돌려볼수록 묘하게 중독 됐다. 자기애가 넘치는 범규 답게 난 뭘 해도 잘한다, 결론이 나는 것이었다.
“대박사건.”
동아리방으로 뛰쳐 들어오는 연준이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인지 얘기는 하지도 않은 채, 연준은 고물에 가까운 동아리방 컴퓨터 앞에 앉았다. 부팅하는데만 삼분이 걸렸다. 뭐야? 뭔데. 형 무슨 일이예요? 한마디씩 거들며 연준의 행동에 동조했지만, 연준은 손톱만 물어뜯을 뿐이다. 컴퓨터가 켜지자 연준은 곧바로 싸이월드에 접속했다. 연준이 보여준 것은 다름아닌 쪽지 한 통이었다.
안녕하세요. ㅇㅇ엔터테인먼트 캐스팅 담당자 ㅇㅇㅇ입니다.
저희 엔터테인먼트에서는 내후년 하반기 데뷔 예정인 글로벌 남자아이돌그룹 오디션을 진행중입니다.
최연준님이 싸이월드에 올리신 영상 중에서, 2학년 최수빈님, 최연준님, 그리고 1학년 최범규님 총 세분이 저희가 찾는 인재상과 적합하다고 생각되어 이번주 토요일 진행 예정인 공개 오디션 참석 여부를 묻고자 연락 드리게 되었습니다.
참석이 가능하시다면 아래 번호로 문자 혹은 연락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모두가 연준에게 들러 붙어 그 쪽지를 읽었다. 가장 먼저 읽은 이학년 선배가 개뻥. 개뻥카다 이건. 하고 김새는 소리를 했다. 야 진짜야. 여기 엄청 유명하잖아. 다른 선배가 반박했다. 범규도 언뜻 이름은 들어본 소속사였다. 내용은 그럴듯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내용 안에 저와 수빈이 형, 그리고 연준이 형까지 있다는 게 비현실적이었다. 동아리방은 난리가 났다.
“그래서 어떡할 건데?”
연준에게 물은 사람은 수빈이었다. 눈이 마주칠까 봐 일부러 수빈과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범규는 수빈을 흘깃 훔쳐 보았다. 쪽지 내용을 제법 믿고 있는 듯 했다. 어쩌긴. 당연히 가야지. 가끔 오디션을 보러 다니기도 했고, 관련 과로 진학할지 고민에 빠져있던 연준은 일말의 망설임이 없었다. 나도. 수빈이 연준의 말에 동조했다. 이번주 토요일이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범규는 단 한번도 아이돌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모두의 시선이 범규에게 집중됐다. 마치 범규에게 결정권이 달려 있단 듯이. 야 범규. 너도 걍 같이 가자. 이거 된다고 바로 아이돌 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오디션 한 번 보는 거였다. 연준이 범규를 재촉했다. 사실 다른 것 보다도 마음에 걸리는 건…
수빈이었다. 범규가 수빈의 쪽을 힐끗, 다시 한번 훔쳐보았다. 수빈은 이미 범규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떠한 말도 없이 찰나의 시간이 두 사람 사이를 흘렀다. 그 찰나에는 둘을 제외한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범규는 다시 한번 운명이 생각났다. 우리 운명인가봐, 하던 수빈이. 수빈은 분명 사람 홀리는 재주가 있는 것이다. 범규는 그 운명을 계속 믿어보기로 했다.
“저도 갈래요.”
“그럼 전화 니가 해봐.”
나 전화 공포증 있음. 연준이 수빈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아직 진짜로 실재하는, 소속사에서 연락이 온 건지 확인도 안 난 마당에 동아리방은 벌써부터 세 명이 아이돌로 데뷔하는 시나리오를 써내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수빈이 복도로 나가 연준 대신 통화를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모두가 숨죽여 수빈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동아리방으로 돌아온 수빈의 얼굴에는 묘한 흥분감이 돌았다.
얘들아. 우리 진짜로 오디션 보러가는 거 맞나봐.
오디션에 처음인 수빈과 범규는 오직 연준에게 의지했다.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소속사까지 가려면 이 촌구석에서는 적어도 지하철을 세 번은 갈아타야 했고 두시간이 걸렸다. 연준을 가운데에 두고 세 사람이 지하철에 나란히 앉았다. 갈아탄 마지막 지하철이었다. 교통편만해도 진즉 기가 다 빨리는 마당에 연준은 대체 어떻게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건지. 범규는 새삼 신기했다. 연준은 오디션보다도 그 소속사가 소녀시대의 소속사인 SM과 멀지 않다는 것에 더 의의를 뒀다. 누나들이 자주 가는 식당에 꼭 가보고 싶다고 두 사람을 졸라대는 바람에 범규와 수빈은 하는 수 없이 그러자고 했다.
오디션을 준비할 시간은 범규에겐 부족했다. 범규는 제가 그 앞에서 뭘 하고 왔는지 기억도 안 났다. 대충 가장 많이 췄던 춤을 췄는데 심사를 하는 사람들 표정이 그닥 좋지 못했던 것 같았다. 얼이 빠진 채로 멍하니 수빈과 연준의 차례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수빈은 피곤한 기색이 여력했고, 연준은 개중 가장 멀쩡해 보였다. 이제서야 긴장이 풀렸다. 기획사 건물을 나가며 곳곳에 소속된 아이돌들의 화보며 앨범으로 꾸며져 있는 내부를 구경했다. 전혀 다른 세계의 얘기 같았다. 평생 못해볼 경험 하나 연준이 형 덕에 한다고 생각했다.
세 사람은 기어코 연준의 주도로 소녀시대의 단골 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다. 내친김에 SM 건물 근처도 가보았다. 범규는 무덤덤했는데 연준은 난리가 났다. 소녀시대는 코빼기도 안보이는데 좋단다. 누나들의 흔적을 밟는 것만으로도 좋다나 뭐라나.. 범규는 연준이 형이 제발 SM 오디션에 합격하게 해달라고 진심으로 빌었다. 생각해보면 제가 수빈을 좋아하는 것이나 연준이 소녀시대 누나들을 좋아하는 것이나 별 다를 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진심으로 응원이 됐다.
그러다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러 가던 도중이었다. 수빈이 낯선 사람에게 붙잡혔다. 그것도 모르고 연준과 범규는 앞서 걷던 중 수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고개를 뒤로 돌렸다. 수빈이 심각한 표정으로 낯선 남자의 얘기를 듣고 있다.
뭔데 그래? 연준이 먼저 다가가자 남자는 수빈에게 명함 하나를 주고 제 갈 길을 갔다. 뭐야? 저 사람 누구야? 수빈의 표정이 얼떨떨하다. 손에 쥐어진 명함을 골똘히 보았다. 연준이 그것을 뺏어 들어 읽었다. 대박. 음절 하나하나에 힘이 실려 있다. 길거리 캐스팅인가 뭔가. 그거 아니야?
연준이 호들갑을 떨었다. 나보다 최수빈이 먼저 데뷔할 지도 몰라. 지하철 개찰구로 들어가며 교통카드 찍히는 소리가 삐빅, 효과음처럼 났다. 비현실적이었다. 수빈이 잘 생긴 건 맞았다. 그러나 서울 한복판에 내놔도 채갈 정도로 잘생겼다는 건 얘기가 달랐다. 너 먼저 연생으로 들어가고 나도 좀 꽂아줘라. 연준은 김칫국부터 마셨다. 수빈은 알겠다, 아니다 말도 없이 애매하게 뭐래. 하고 연준의 어깨를 퍽퍽 쳐댔다.
연준이 지하철에 앉자마자 창문에 머리를 대고 잠이 들었다. 그걸 본 범규도 연준을 따라서 자는 척을 했다. 눈을 꼭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 본 적은 없었다. 수빈이 연습생이 된다면. 축하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관계가 완전히 끝난 다는 것을 뜻했다. 이 얇고 일방적인 관계 마저 끊어진다면 그때 난 어떡해야 하는 걸까. 혼란스러웠다.
“얘들아 오늘 고마웠다.”
지하철 세 번을 갈아타는 동안 연준은 환승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전부 잠에 취해있었다. 개운한 표정을 한 연준과,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나머지 둘이었다. 역을 나선 연준이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오늘 오디션도 그다지 잘 본 것 같지 않은 기분이 들어 영 언짢았지만 그런 기분은 뒤로 하기로 한다. 연준의 입에서 입김이 새어 나왔다. 덕분에 완벽한 겨울이 왔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시간만큼 마음도 저절로 흘러가면 좋을 텐데. 마음에는 불변의 진리도 쓸모가 없다.
연준의 집은 둘의 집과 반대 방향이었다. 셋은 별다른 말 없이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집까지는 수빈과 같이 가야 했다. 여기서 수빈과 따로 떨어져 집에 가기는 애매했다. 범규가 미적거리며 발걸음을 느리게 하는 사이 수빈이 같이 가자, 하고 불쑥 옆에 붙었다. 지나치게 가까운 어깨가 신경쓰였다. 하지만 오로지 범규만 신경이 쓰이는 듯 했다. 고개를 돌리면 바로 옆에 수빈의 옆모습이 보였다. 어쩌면 수빈에게 이런 일 쯤은 아무것도 아닌것 같았다. 고백을 받는 것. 그리고 고백의 당사자와 아무렇지 않은 사이로 지내는 일련의 과정들이. 그럴 지도 몰랐다.
“형은요.”
가수, 그런 거 하고 싶어요? 범규가 먼저 정적을 깼다. 어쩌면 형에겐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솔직해도 손해볼 것이 없을 것이다. 물끄러미 바라본 수빈의 얼굴. 오랜만에 마주치는 눈빛이었다. 처음 고백을 했을 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범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눈빛에 점점 마음을 내려놓게 된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엔 여전히 다정함이 담겨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니.”
“근데 왜 갔어요.”
왜 오디션을 보러 갔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연준의 말엔 어물쩍 넘어가놓고선 범규의 질문에는 금세 대답했다. 궁금해? 궁금하면 오백원. 꼭 연준이나 할 법한 썰렁한 개그를 쳤다. 와 진짜 재미 없어. 범규가 수빈을 무시하고 빠른 걸음으로 앞서 질렀다. 수빈이 범규야! 하고 재빨리 둘의 간격을 따라잡았다.
“네가 보러 갈 것 같아서.”
그리고 돌아오는 대답은 의외였다. 형은 자길 좋아한다던 사람 앞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나? 형은 자기가 하는 모든 행동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지 전혀 모르는 것일까?
“합격 해도 안 할거예요?”
“안 해.”
“아까 길거리 캐스팅은요?”
“형 모의고사 전교 십 등이야~ 그런 거 안 해. 적성에 맞지도 않고.”
거짓말. 최연준한테 물어보던가. 헉 진짠가. 중간과 바닥 사이에서 빌빌대는 제 성적과 비교됐다. 범규는 아이돌 하고싶어? 다정하게 묻는 주체는 수빈이 됐다. 범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딱히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지금도 별 생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수빈처럼 공부를 잘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범규는 이도 저도 아닌 지금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 사실. 모의고사 전교 십 등 뻥인데.”
“아 뭐예요. 진짜 믿었는데.”
“왜냐고 또 안 물어봐?”
수빈이 범규를 보챈다. 정말 이상한 형이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범규는 저를 엉뚱하다고 했던 수빈이 저보다 더 엉뚱하다고 종종 생각했다. 범규는 수빈의 의중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왜요?”
아파트 단지가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수빈의 걸음이 먼저 느려졌다. 범규도 자연스럽게 수빈의 걸음에 맞췄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아직 좋아한단 말을 못해서.”
범규는 표정을 숨기는 법이 없다. 수빈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순식간에 범규의 표정을 굳히게 한다. 여기서 재빨리 사라지는게 좋을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맞장구를 쳐주는게 맞는 것인지 판단하기도 전에 수빈의 입이 떨어진다.
“나한테 고백하고 도망간 사람이 있는데. 걔한테 좋아한다고 해야 되거든.”
범규의 발걸음이 멎었다.
말문도 막혔다. 뭐지? 이 기시감은.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스토리. 잠시 지구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은 보류한다. 형은 정말 잔인하고 다정했다. 어쩌면 내 얘기일지도 몰랐다. 첫 인류의 탄생을 기다리는 신보다도, 범규는 간절했다. 수빈의 말을 좀 더 기다려 보기로 한다. 어쩌면, 수빈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한다.
범규야. 있잖아. 비문학 시간에 선생님이 주어 목적어 서술어로 이루어진 문장을 예시로 만들어 보라고 했는데. 교과서에 뭐라고 적었는지 알아?
“최수빈은 최범규를 좋아한다.”
네가 운명을 믿냐고 물었을 때. 부끄러워서 제대로 말하지 못한 걸 지금까지 후회하고 있어. 그거 알아? 새학기 첫날 네가 빨간색 후드집업을 입고 동아리 방에 들어온 날, 가입해도 되냐고 나에게 물었던 날. 너와 마주친 순간 나는 생에 최초로 운명이라는 걸 믿었어. 너에 대한 소문들. 그건 내가 보는 너와 달랐어. 내가 바라보는 니가 나를 봐주길 기다렸어.
수빈은 머쓱해했다. 범규의 대답을 듣지 않았다. 빨간색 후드집업을 기억하는 수빈이 아득했다. 저도 기억 나지 않는 이야기들이 수빈에 입에서 튀어나온다. 범규도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하다. 주어 목적어 서술어가 죄다 엉켜버린 채로 굳어 있다.
나는 아직 여기서 지금 당장 너와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
그런 범규의 어깨 위로 수빈이 손을 걸쳤다. 심장이 어깨 위로 튀어나올 것 같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또 한다. 제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수빈이 좋았다. 알 수 없는 다정함이 좋았다. 머뭇거리는 저를 끌고가는 수빈이 좋았다. 바라볼 때 까지 기다리는 수빈이 좋았다. 운명을 처음부터 믿었다던 수빈이 좋다. 둘의 발걸음이 느릿느릿 아파트 단지 안을 향했다. 나 사실 모의고사 10등 맞아. 거짓말. 진짠데. 그럼 왜 거짓말 했어요. 거짓말 안 하면 평생 놓칠 것 같아서. 좋아해 범규야.
그러자 아파트 단지가 떠나가도록 범규가 소리를 질렀다.
뚜비니랑 범규랑 오늘부터 1일! ♡
/
fin.